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높은 임금과 확실한 고용안정,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모든 일자리에 언제나 보장하기는 어렵다. 노동시장에도 냉정한 교환관계(trade-off)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받는 보상에는 일의 내용과 시간의 대가를 넘어 시장 변동성과 고용 해지의 위험을 개인이 얼마나 감수하는가에 대한 ‘위험 프리미엄’이 포함된다. 가령 억대 연봉을 받는 빅테크 기업의 핵심 기술인력은 실적이 꺾이는 순간 자리를 걱정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수가 낮은 공무원의 정년은 확실히 보장된다.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는 쪽이 더 높은 보상을 받고, 안정을 얻는 쪽은 상대적으로 덜 받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다.
문제는 이 균형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대표적이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1차 노동시장은 두터운 고용보호 법제와 높은 교섭력을 바탕으로 많은 보상과 강력한 고용안정을 함께 누리는 반면 중소기업·비정규직 중심의 2차 노동시장에는 적은 임금과 고용 불안이 공존한다. 2025년 기준 대기업 정규직은 전체 임금근로자의 약 12% 수준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88%의 근로자와 비교해 임금은 약 1.7배, 근속연수는 약 2.1배 수준이다. 사회보험 가입률의 격차도 뚜렷하다. 시장의 교환관계에 역행해 고용 불안이 큰 집단일수록 낮은 임금과 취약한 사회안전망에 놓이는 구조다.
이러한 이중구조의 부담은 노동시장에 첫발을 딛는 청년과 취약계층이 주로 지게 된다. 높은 임금과 강한 고용 보호가 결합된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커질수록 기업은 신규 채용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근속연수에 따라 인건비가 계속 늘어나는 데다 한 번 채용한 인력을 조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양질의 일자리로 진입하는 문은 좁아지고 중소기업·비정규직에서 대기업·정규직으로 이동할 기회도 줄어든다.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들은 취업을 미루거나 구직을 포기하게 되고 이는 노동시장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특정 일자리의 높은 보상과 고용안정을 지키는 데 치중하면 오히려 일자리 창출과 노동시장 내 이동이 제약될 수 있다. 이제는 개별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근로자가 일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 해법이 바로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다. 유연안정성은 기업에는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보장하고, 근로자에게는 재취업 지원과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특정 일자리가 아닌 노동시장 전체의 고용안정을 높이는 접근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노동시장 내부 격차를 줄이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정규직에 대한 과도한 보호를 완화하고 연공서열이 아닌 일의 가치와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임금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래야 근로자가 기업 규모나 고용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역량에 맞는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다. 이렇게 확보한 유연성을 바탕으로 기업은 산업 변화에 대응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해서 창출해야 한다.
동시에 국가는 실직과 전직 과정에서 근로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실업급여로 실직 기간의 소득을 보전하고 급변하는 산업 수요를 반영한 직업훈련으로 새 일자리에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구직자와 기업을 잇는 고용서비스가 더해질 때 안전망은 비로소 재취업의 발판이 된다. 고용 위험을 기업이나 개인에게만 지우지 않고 사회가 함께 나눠야 근로자는 변화를 두려움이 아닌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많은 보상과 확실한 고용안정을 바라는 마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둘의 교환관계를 외면한 채 일부 일자리에서 기존 혜택만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면 기업의 채용과 투자가 위축되고 미래세대의 기회도 줄어들 수 있다. 이제 보상은 성과와 책임에 상응해야 하고, 고용안정은 특정 일자리의 보호를 넘어 새로운 일자리로의 이동까지 뒷받침해야 한다. 기업에는 변화에 대응할 유연성을, 근로자에게는 실직 후 다시 일어설 기회를 보장하는 것. 이것이 우리 노동시장이 나아가야 할 유연안정성의 길이다.
출처: 서울경제(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