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협 활동
국내 유일의 업종별 경제단체 공동협의기구
국내 유일의 업종별 경제단체 공동협의기구
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눈부신 백사장 너머 1000여개 섬을 품은 푸른 바다가 투명하게 일렁인다. 출장지의 풍광은 천국에 비길 만한데, 수몰이 임박한 평균 해발 1.5m의 현실을 떠올릴수록 부서지는 파도는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기후위기로 나라를 떠나야 하는 상황, 불타는 석양 아래로 몰디브가 가라앉는다.
가뭄과 폭우, 산불과 사막화는 더 이상 국지적 재난이 아닌 전 지구적 일상이다. 사계절 뚜렷한 금수강산도 예외일 수 없다.
대형 산불과 불규칙한 장마가 반복된 지 오래, '대구 사과'는 아득한 추억이 됐고, '동해 오징어'를 쫓는 어선들의 엔진은 식어간다.
올해 198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은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성적표도 나오기 전에 추가 상향 압박을 감당해야 할 판이다. 헌법재판소는 2031~2049년 세부 목표를 법에 명시하라고 결정했다.
기후위기 대응이 시급하다는 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다. 과학과 합리성, 사회적 공감대, 강한 리더십이 필수다. 역사와 산업 구조에 따라 접근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제조업 기반인 우리 사정은 더 난해하다.
올해 초 제2기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공직 시절 기후 정책이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 조정을 거쳐 힘겹게 추진되는지 경험했기에 책임과 부담이 크다. "하자"는 명분은 분명하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하자"라는 설득이 쉽지 않다. 두터운 데이터와 치밀한 계획에 기반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석유화학, 철강, 제지, 기계, 시멘트 산업의 주역은 중견기업이다. 탄소중립과 녹색성장의 핵심 주체라는 뜻이지만, 오직 성장의 연속을 통해 존립을 이어 온 터라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금과 기술력, 정보, 인력 모두 부족하다. 연구개발(R&D)·설비투자·금융·세제 지원, 인센티브 제공, 규제 완화 등 정부의 전방위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새 정부는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공약했다. 환경부, 산업부, 기재부에 흩어진 권한을 통합해 정책 집행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탄소중립과 기후위기 대응의 컨트롤타워다. 로드맵에는 탈석탄(2040년), 산업단지 RE100, 탄소세 도입까지 포함됐다. 과제가 어려운 만큼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영국은 2023년 '에너지안보·넷제로부(DESNZ)'를 신설했지만, 에너지 안보와 기후목표 간 정책 일관성 확보에 난항을 겪었다. 부처 간 정책조율을 위한 독일 '기후 캐비닛'의 성과도 멀리서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눈에 띄는 조직 신설보다 어젠다의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정책의 원리를 다시금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다음은 비용 문제.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에너지 전환, 산업 재편, 인프라 투자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의 부담 주체와 분담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정치적 고려가 개입된 결정이 가격 시그널을 왜곡해 에너지 효율과 저탄소 투자를 저해한 전기요금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기후위기 대응의 해법은 단일하지 않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수지만 원전과 가스 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침 대통령은 기저전력으로서 원전의 필요성을 인정한 에너지믹스를 강조했다. 이념에 휘둘린 극단적 접근이 아닌, 공동체의 동의에 기반한 실효적 방편을 찾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사라지는 순간, 인류는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균형잡힌 과감한 대응, 국민의 신뢰를 얻는 '도전적이되 실현가능한' 새 정부의 기후 정책을 기대한다.
출처: 파이낸셜뉴스(6.17)